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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by 오늘의 클로버 2021. 4. 2.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3.30 ~ 1890.7.29

 

너무나 유명해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만한 반고흐.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살면서 한번쯤은 반고흐의 작품을 보지 않았을까요?

 

 

네덜란드 출신으로 주로 남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한 반고흐.

고갱과 친밀했으며,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살아생전 공식적으로 판매한 그림은 딱 한점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가치와 가격이 어마어마 합니다.

 

-

 

1853년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준데르트(Zundert) 지역에서

목사인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고흐와 어머니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 사이에서 태어난 반고흐는

기숙학교를 다녔었는데 가난으로 인하여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1869년 숙부가 운영하는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하여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고,

당시 반고흐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873년부터는 헤이그를 떠나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영국에서 머물렀으며

1875년부터는 파리지점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는 런던에서부터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어 화랑일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뿐이었던 그는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하게 됩니다.

 

반고흐는 성직자의 길을 열망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했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6개월간 평신도로서 전도활동만을 허가했다고 합니다.

 

반고흐는 가난한 사람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며 전도활동에 전념했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 교회로 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880년 실의에 빠진 빈센트는 그동안 계속 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는 미술공부를 위해 다시 파리로 갔고, 드로잉에 대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반고흐는

라파르트라는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 드로잉을 배웠습니다.

이후 반고흐는 외사촌이자 헤이그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반고흐는 그동안 열광했었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어 

목사인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곤 했습니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그에게 그림을 지도하던 안톤 모베와도 절교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반고흐는 알콜중독에 매독 환자였던 매춘부 출신의 크리스틴이라는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와 지내는 것을 우려한 반고흐의 가족들이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했습니다.

반고흐는 크리스틴과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했으나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됩니다. 반고흐는 이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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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반고흐는 브뤼셀, 헤이그, 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와 농민 등과 같은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리곤 했습니다.

반고흐의 초기 걸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는 이 무렵의 작품입니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빈센트는

코르몽의 화숙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됩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케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 였습니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낀 반고흐는 1888년 2월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게 됩니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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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새로운 예술촌의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했습니다.

그리하여 장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해 순탄하지는 못했습니다.

1888년 12월 반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 사건은 당시 호그가 살던 아를 마을 전체를 술정이게 만들었고, 미치광이와는 불안해서 살 수 없다는

탄원서가 제출되어 병원에 반강제로 입원하거나 집에 돌아와서도 격리된 상태로 감금되다시피 생활해야 했습니다.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던 고흐는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림을 그렸습니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습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과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스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했다고 알려졌으나

일각에서는 타살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광기와 집착, 슬픔과 고통 등의 수식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빈센트 반고흐.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품은 생전에 끝내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준 것은 1903년 유작전 이후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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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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